과학자의 목소리가 갈수록 줄어드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과학기자인 저는 한때 정치계에 몸담았습니다. 후훗. 서른 살밖에 안된 제가 “무슨 정치계에 몸담았냐?”고 항의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국회 모 의원실에서 과학기술 정책을 담당하는 비서였습니다.
지난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홍창선 전 KAIST 총장을, 한나라당은 서상기 전 한국기계연구원장을 비례대표로 영입했습니다. 과학기술이 사회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입니다. 그래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와 바른과학기술사회실현을위한국민연합(과실연)은 이번 총선에서 “과학기술계 비례대표를 20% 배정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의∙약학 분야를 포함해 원내 4당 당적을 가진 지역구와 비례대표 후보는 모두 35명, 전체후보의 5%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순수한 과학기술자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한나라당 비례대표 29번 최순자 인하대 생명화학공학과 교수가 유일했습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의사나 약사, 간호사협회 회장이나 부회장이었고 통합민주당 비례대표 17번 김진애 KAIST 미래도시연구소 겸직교수는 연구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건축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과학자보다는 엔지니어라 할 수 있죠.
과총 뉴스레터에 따르면 과총과 57개 과학기술 관련단체는 두 차례에 걸쳐 성명과 보도자료를 내고 “지역구와 비례대표 공천에 있어 과학기술인을 10% 이상 안배해야 한다”고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을 방문해 각 단체의 서명이 담긴 건의문을 직접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번 비례대표 후보 공천을 맡았던 여야 정당의 관계자들은 이같은 목소리를 전혀 전해 듣지 못했다고 하네요. 다음은 뉴스레터에 실린 기사의 일부 내용입니다.
민주당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회의 간사를 맡았던 김주영 의원은 “다른 분야에서는 성명서나 서명서를 전달 받았고, 통일∙안보 분야에 있어 정치적인 안배가 있었다”며 “하지만 과학기술계로부터는 이런 움직임을 전달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비례공천의 실무를 맡았던 당무조정국 관계자는 “과총을 비롯한 과학기술계가 비례대표 공천과 관련해 성명을 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나라당 비례대표 추천에 있어 특정 직능에 대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고는 보지 않으며 과학기술계를 배제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서 “하지만 비례대표 공천은 최고위원회에서 직접 이뤄졌기 때문에 기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밝혔다.
과학기술계에서는 분명 전달했는데, 실제 공천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받지 못했다? 과학기술계와 정치계가 얼마나 소통이 안 되는지 확인시켜주는 대목입니다.
과학기술계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행정조직 개편 때 과학기술부의 해체를 반대하며 정치계에 심판(?)을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과연 어떤 심판을 한다는 얘기일까요?
과실연은 지난 3월 12일 ‘과학기술 최우수 17대 국회의원’을 선정했습니다. 지난 4년간 과학기술 관련 입법 및 법개정에 적극 나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정책제안과 제도개선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평가된 사람을 선정했다고 밝혔습니다. 다음은 선정된 국회의원 명단입니다.
△김영선(한나라당) : 과학기술방송입법 추진. 사이언스 채널 활성화 기여.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으로 개인 사생활 보호. 정보통신대 법적지위 보장
△박근혜(한나라당) : 발명진흥법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발의. 대구테크노폴리스와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연구원 설립추진. 이공계 출신 국가 지도자로서 과학기술혁명 7대 전략 제안.
△서상기(한나라당) : 과학기술공제회 예산확보. 기술사 지원제도 개선. 지방R&D특구 지정
△변재일(통합민주당) : 과학기술기본법 개정, 기초연구진흥회 설립. 정보화촉진 기본법 개정. 전파자원의 효율적이고 공평한 이용을 촉진.
△유승희(민주당) : 통신요금 거품을 분석해 요금인하 주도. 여성과학기술인들의 숙원사업이던 대덕영유아 보육센터 설립.
△이상민(민주당) : 과기부 정통부 폐지하는 정부조직개편에 맞서 민주당 공청회 주도. 대덕특구 연구환경 개선.
△이종걸(민주당) : UCC 소프트웨어 전파법 전기통신사업법 등 IT관련 법안의 개정 주도. CID 요금무료화, SMS 요금인하 관철
△홍창선(민주당) : 의료 바이오분야, 우주개발, 방송통신 융합 관련 법안들의 발의, 테크노닥터 사업 추진. 국회의원 연구단체 ‘사이앤텍포럼’ 운영.
개인적으로 과학기술정보통신상임위(과기정위)에 몸담았던 저로서는 박근혜, 유승희, 이종걸 의원의 선정은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국회의원은 일반상임위와 특별상임위를 하나씩 맡게 되는데, 저는 과기정위 소속 의원실에서 근무했었습니다.
YTN이 사이언스TV를 개국했는데, 대다수 의원들이 사업성을 논하며 안 된다고 할 때 ‘독불장군’처럼 과학기술방송입법을 주장한 김영선 의원이나 기계공학 박사를 보좌관으로 둬서 기초연구진흥회 설립 같은 것을 주도한 변재일 의원, 대학원생의 연구환경을 개선한 연구실 안전관리법을 발의한 이상민 의원은 선정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4년 연속 시민단체가 선정한 국감 베스트 5에 선정된 한나라당 김희정 의원이나 민주당 강성종 의원도 국회 전문위원들에게 물어보면 분명 ‘과학기술 최우수 17대 국회의원’에 선정돼야 한다는 답변이 나올겁니다.
아마도 정치적인 영향력을 고려해 박근혜 의원이 포함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신뢰할 수 없는 결과를 내보내서는 과학기술계가 힘이 실린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지표로 국회의원을 평가해야 합니다. 또 낙선운동을 벌일 만큼 단합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인을 한데 모으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난번 과학기술 분야 비례대표로 영입된 홍창선 의원은 후보등록을 하지 않았고 서상기 의원은 대구 북을 지역구로 출마합니다. 지역구로 출마한다면 과학기술인으로서 평가받기 어렵습니다.
다만 자유선진당으로 출마한 이상민 의원은 비록 과학기술인은 아니지만 대덕특구에 거주하는 과학기술인에게 평가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과학기술인이 국회에 대거 등원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합니다.
글_정서금영 기자 symbio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