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3/31 사랑은 움직이는 걸까? (2)


어제는 회사 부근에서 누군가의 소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경애♡금영’이라고 쓰인 은행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장경애 과학동아 편집장님과 서금영(나) 뉴스제작팀 기자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던 것이다. 순간 편집장님의 남편 분께서 보았다간 내 뼈도 못 추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닥에 떨어진 낙엽과 나뭇가지를 이용해 냉큼 지웠다. 내 나이가 과년한 만큼 20대 여성들에게도 인기관리를 해야 했다. 만약 내가 못 보고 지나쳤더라면 10년 뒤 은행나무에 새겨진 그녀와 나의 사랑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움직일 것인가? 그대로 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무가 쑥쑥 자라는 만큼 쓰인 글씨가 위로 올라갈 것 같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정답은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되겠다. 단 좌우로 늘어난다.


신기한 것은 나무껍질 안쪽으로 1~2cm 깊이에 새 살이 돋아난다. 이곳이 형성층(부름켜)이다. 나무는 형성층을 중심으로 수직방향으로 길이생장을 하고 지름방향으로 부피생장을 한다.


길이생장은 세포를 하나하나를 쌓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1층을 쌓고 2층을 쌓고 3층을 쌓고 계속 쌓아간다. 그래서 사춘기 시절 나무에 새겨놓은 맹세는 어른이 됐을 때 눈높이 아래에 위치하게 된다.


부피생장은 사람이 나이가 들면 배가 나오듯 옆으로 커지는 것을 말한다. 나무마다 형성층 안쪽과 바깥쪽에 만드는 세포의 비율이 다르기 때문에 수피의 모양이 달라진다. 보통 형성층 안쪽으로 4개의 세포가 생기면 바깥으로 2개의 세포가 자란다.


안쪽은 살을 꽉꽉 채우는 반면 바깥은 부족하기 때문에 수피는 갈라지기 쉽다. 그래서 차력사들이 합판을 격파할 때도 나무기둥에 평행하게 내리친다. 봄에 자란 춘재세포와 여름에 자란 하재세포가 층을 이룬 나이테보다도 나무의 지름방향의 결합이 훨씬 약하다. 나무를 건조시킬 때 가장 많이 갈라지는 방향 역시 지름방향이다.


만약 내가 10년 뒤 편집장님과 나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를 발견했더라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 이름의 거리가 매우 멀어졌다. 은행나무의 거칠은 수피는 더 깊게 갈라졌다. 아마 모진 세월의 영겁을 이겨내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편집장님 가정에 불란을 일으켜선 안 되기 때문인지 뒤를 돌아서자 예쁜 나무에 새로운 ‘사랑의 정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매끈한 느티나무 수피에 젊은 남녀의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었던 것이었다~(춘사의 목소리 톤으로). 인생 초반부터 골이 깊지 않은 나무에 새겨진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세월이 흐르면 점차 멀어지겠지만 은행나무처럼 골이 깊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사랑이 이뤄지기만 한다면 서로 갈구지 않고 다정한 부부로 늙어갈 수 있을 듯 싶다.


하지만 나무에 상처를 줘선 안 된다는 생각에 조각칼로 자국을 내진 않았다. 나무껍질의 대부분은 조금씩 떨어져 자연히 제거되므로 나무에 글씨를 새기려는 시도는 무의미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나무껍질이 아닌 사람의 마음에 내 사랑을 심어야 할 때다.


글_서금영 기자 symbious@donga.com

Posted by 정서금영